우린 이름이 알려 지지지않은 활동가 분들의 삶을 모른다
대부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많은 돈을 탐하면 안되고 바른 생활은 목회자 수준을 원하지
정의연의 압수수색은 검찰의 쇼라고 보는 이들이 많았어
특히 평화의 우리집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이상하다고 생각 하지 않나?
나눔의집 비리는 더욱 확실하게 밝혀 진 것이 많은데 검찰은 나눔의집은 파헤칠 생각도 안한다 언론 또한 마찬가지고
( 위안부 단체에 대해 전반적으로 아는 양윤석님의 글을 뉴스프로가 옮겼는데 맨 아래 첨부를 했다 )
앞서 정의연은 검찰과 미리 상의를 했었다고 한다
평화의우리집 창고에 예전 영수증 목록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찾아서 주겠다
길원옥 할머니가 거주 중이시니 놀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검찰과 합의를 했다고 해
그런데 검찰은 이 약속을 깨고 위안부 쉼터 평와의우리집을 압수수색을 했어
이 행위에 대해 쉼터 소장님은 내내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더군다나 오히려 압수수색 하면서 혹 영수증이 분실 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었다고 해
검찰은 "정의연 고발 등 사건과 관련해 고인을 조사한 사실도 없었고 조사를 위한 출석 요구를 한 사실도 없다"
하지만 그 분에게는 수십년의 봉사 활동에 대한 부정으로 느껴신거지
봉사활동가 분들은 무엇보다 자존심,자부심 하나로 버틴다고...
위안부를 팔아 호의호식을 했다
얼마나 비수가 되는지 모를꺼야
그걸 이용수 할매가 직접 하니 수십년간 활동 하신분에게는 더욱 큰 비수가 되었을거야
그런데 더 영혼을 파괴한 자들이 있었으니 언론과 극우 유투브들이었다네......
우린 조국교수 집앞에서 기자들이 어떻게 했었는지 익히 알고 있지 않나...
개인의 공간에서 우는 윤미향의 사진을.. 조선 이하 특종한 기자 넘들아 니들은 천벌을 받을거다
2019.01.11 윤미향은 손영미 소장님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흐르는 전류, 그만큼 강한 힘이 또 있을까?
2003년에 서대문 경기대 앞에 단독주택을 세를 내서 할머니들의 쉼터를 내고, 당시에는 박물관 건립을 시작한 때라 모든 모금을 박물관 건립에 올인 해야 했고, 실무자들 나 빼고 3 명...
3명이 할머니들 쉼터에 담당 요일을 정해서 이틀씩 잠을 자면서 할머니들 식사를 해드리고
아침에 아침 식사 해드리고 사무실을 나오며 그렇게 쉼터를 운영하기 시작하여 6개월 여를 버티다가
도저히 이대로 할 수가 없어 쉼터 전담 활동가를 찾는데
쉼터에서 기거도 해야 하니 거의 온 삶을 다 갖고 오는 조건인 것이니...
그렇게 온 삶을 다 걸 사람을 찾기는 하늘에 별따기.
여기저기 사람을 찾습니다는 제목으로 사연을 올리고,
기다리기를 또 수 개월...
어느 날, 한 여성이 연락을 주었습니다.
바로 손.영.미.
서울까지 와주었고, 첫 만남에 아...이 사람이다 싶었지요.
급여는 80만원 밖에 못 드린다 하였는데도,
헐... 이 사람, 이리도 좋은 일에 함께 하는 일인데, 괜찮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 겪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
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일은 아니어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때부터 괴로움의 시작이고 연속인데...
할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할머니들 저녁식사 챙겨드린 후 잠시 골목 식당에 함께 앉아 소주 한잔 기울이며 같이 엉엉 울고
오늘은 우리, 할머니 이야기하지 말자고 시작해놓고 결국은 할머니 이야기로 한시간을 보내고,
사표 제출을 세 번...
세 번째 사표를 내던 날, 저는 손영미 소장님 앞에서 엉엉 목놓아 울면서 붙잡고 싶었습니다.
결국 제 이야기를 듣고 제 지난 삶 속으로 쏙 들어와버려 세 번째 사표도 결국은 다시 접고, 손영미 소장님은 14년을 우리와 함께 해 왔습니다.
쉼터에서 할머니들과 지내면서 대학원에서 사회복지 공부를 하라고 제안하여 또 그 길 개척하였고, 어머나 석사를 하더니 박사과정에도 도전하여 또 그 길 개척하고, 그녀 덕분에 우리 쉼터 '평화의 우리집'에서 만들어내는 우리와 할머니들의 웃음이 우리 운동에 큰 에너지가 되게 했습니다.
할머니들과의 토론, 상황공유, 치유활동,
그 속에서는 우리는 할머니들과 우리가 어떻게 '함께' 활동해 가야 할지, 어떤 이는 대상으로, 혹은 수동적으로 머무르지 않고,
목소리가 약한 할머니도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게 하는 길을 만들어내며 그렇게 운영되어 왔습니다.
노래교실을 열어 그 교실을 통해 배운 아침이슬 노래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위원회발족식때 할머니들은 불러주었습니다.
정말 세 번째 사표를 마지막으로 지난 14년동안 우리 손영미 소장님, 한 번도 제게 그만 둔다는 소리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가 할머니들을 어떻게 모시는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저이기에 그녀의 61세, 회갑이라고 하는 생일이 너무나 특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달 전부터 회갑기념모임을 손영미 소장님 몰래 만들어서 준비하고, 우리 이쁜 역시 10년 이상의 동지 김동희와 선미와 정훈이...
그리고 아직 10년은 안되었지만, 10년 그 이상의 마음을 함께 해 온 미디어몽구((김정환)님과 홍인기샘....
사무실 근처 프랑스백반 레스토랑에 모여 적은 사람이었지만, 너무나 많은 열기가 가득했던 회갑잔치를 열었습니다.
사회자 정훈이의 명에 따라 서로 손을 잡고 사랑합니다도 외치고, ㅎㅎ 레스토랑 사장님은 무슨 이상한 종교집단인가 했답니다. ^^
축하 인사도 하고, 비~~싼 선물도 드리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사이즈까지 미리 감지하여 깜찍한 선물도 드리고....
우리 손영미 소장님.... 영미 언니...
61 생일을 우리와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고맙고, 그래서 생일을 준비하는 우리도, 축하를 받는 손영미 소장님도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우리 소장님, 내내 건강하고 행복하자요.
<故 손영미 소장님 글 옮김>
그녀 윤미향을 만난 건 2004년 5월
쉼터에 기거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여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트라우마는 만만치 않아 3개월 사이에 몇 번의 사표를 내고 마지막 그해 8월이었던가?
그녀의 눈물을 보고 다시는 사표 이야기 하지 않을께요. 그리고 지금까지 동지처럼, 친구처럼 함께 울고 웃으며 지내오는 동안 그녀의 머리는 어느새 흰머리가 늘어났다.
우리는 그 동안 그녀에 대하여 얼마나 배려하며 살았을까?
대표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당연히 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오랫동안 밤을 지새우며 20년간의 수요일과 25년간의 수요일 책을 만들어내는 작업들을 했지만 그 흔한 출판기념회도 한번 해주지 못하고. 또한 문제해결을 위해 전국 아니 세계를 다니면서 때로는 아픈 몸을 이끌었지만 대표니까 당연히... 하고 그냥 지나쳐버린 건 아닐까
그녀는 남에게 베푸는 것을 아주 좋아하여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기부를 하고...정대협, 정의연, 김복동의 희망으로...때로는 노동현장으로 달려가 함께 슬퍼하며 도움을 약속하고,
지금 생각하니 너무나 많은 일들을 그녀는 웃으며 했기에 당연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큰맘이었는지 이제는 깨닫는다.
갑자기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로 간다는 이야기에 축하하고 힘을 주어야하는데 괜시리 남겨진 마음이 무겁다.
김복동 할머니 방으로 올라가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할머니와 긴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부디 더 좋은 곳에서 할머니께서 원하시던 위안부문제, 남북문제, 조선학교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큰 힘이었다.
쉼터에 급한 일이 생기면 새벽에도 전화를 하기에 그녀의 머리맡에는 24시간 전화기가 떨어질 줄을 몰랐다.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를 비롯하여 전국 할머니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며, 김복동 할머니 살아계실 때는 모든 것을 할머니와 머리 맞대고 의논하던 그녀 윤미향
이제는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떠나야하기에 기쁨으로 보내야만 하고, 그러는 내게 김복동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아주 활짝 웃으며 보내주어야지 하신다.
처음 겪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들...밖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다운 일은 아니어서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 그 때부터 괴로움의 시작이고 연속인데...할머니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난 다른 활동가들도 존경을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과 부대끼면서 활동하는 것은 다른 활동 보다 더 힘들 것이라고 본다
집안에 할머니가 계신 집들은 공감을 할거야
세상없는 천사같은 할머니도 나이가 들면 아이로 변하면서 떼쓰기 , 고집 , 삐치기....
다행히 울 할머니는 끝까지 천사셨지만 한다리 건너 할머니는 끝장을 보셨지...
그런데 이분들은 상상할 수 없는 삶을 보내셨어...
손영미소장님은 17년을 같은 공간에서 저 삶을 사셨어....
윤미향의 추모사야..
사랑하는 손영미 소장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나랑 끝까지 같이 가자 해놓고는
그렇게 홀로 떠나버리시면 저는 어떻게 하라고요...
그 고통, 괴로움 홀로 짊어지고 가셨으니
나보고 어떻게 살라고요...
할머니와 우리 손잡고
세계를 여러바퀴 돌며 함께 다녔는데
나더러 어떻게 잊으라고요...
악몽이었죠.
2004년 처음 우리가 만나
함께 해 온 20여년을 너무나 잘 알기에
이런 날들이 우리에게 닥칠 것이라고
3월 푸르른 날에조차 우리는 생각조차 못했지요.
우리 복동 할매 무덤에 가서 도시락 먹을 일은 생각했었어도
이런 지옥의 삶을 살게 되리라 생각도 못했지요.
그렇게 힘들어 하면서
“대표님, 힘들죠? 얼마나 힘들어요”
전화만 하면 그 소리...
나는 그래도 잘 견디고 있어요. 우리 소장님은 어떠셔요?
“내가 영혼이 무너졌나봐요. 힘들어요.”
그러고는 금방
“아이고 힘든 우리 대표님께 제가 이러면 안되는데요... 미안해서 어쩌나요..”
우리 소장님,
기자들이 쉼터 초인종 소리 딩동 울릴 때마다..
그들이 대문 밖에서 카메라 세워놓고 생중계하며,
마치 쉼터가 범죄자 소굴처럼 보도를 해대고,
검찰에서 쉼터로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하고,
매일같이 압박감.. 죄인도 아닌데 죄인의식 갖게 하고,
쉴 새 없이 전화벨 소리로 괴롭힐 때마다
홀로 그것을 다 감당해 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저는 소장님과 긴 세월을 함께 살아온 동지들을 생각하며 버텼어요.
뒤로 물러설 곳도 없었고 옆으로 피할 길도 없어서
앞으로 갈 수밖에 없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버텼어요.
그러느라...
내 피가 말라가는 것만 생각하느라
우리 소장님 피가 말라가는 것은 살피지 못했어요.
내 영혼이 파괴되는 것 부여잡고 씨름하느라
우리 소장님 영혼을 살피지 못했네요.
미안합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
소장님...
나는 압니다.
그래서 내 가슴이 너무 무겁습니다.
쉼터에 오신 후 신앙생활도 접으셨고,
친구관계도 끊어졌고,
가족에게도 소홀했고,
오로지 할머니, 할머니 ...
명절 때조차도 휴가한번 갈 수 없었던 우리 소장님...
미안해서 어쩌나요.
당신의 그 숭고한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내 가슴 미어집니다.
외롭더라도 소장님,
우리 복동할매랑 조금만 손잡고 계세요.
우리가 함께 꿈꾸던 세상,
복동할매랑 만들고 싶어 했던 세상,
그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요.
사랑하는 나의 손영미 소장님,
홀로 가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그리고
이젠 정말 편히 쉬소서.
지금 심정을 글로 풀기 힘든 나의 능력이 아쉬운데
페이스북 에서 정말 같은 심정을 느낀 글을 만났다
이분의 성함은 숨길련다 또 어떤 것들이 이분에게 해꼬지를 할려나 싶은 생각도 들고
몇년 전 건강에 적신호가 켜져 일을 그만두고 치료에 전념한 후 활동재기를 준비하며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해보자 싶어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활동을 하려고 했다. 공부하는 것도 좋았고 현장에 몆번 나갔을 때 반응도 좋았지만 왠지 신이 나지 않았다. 반기시는 할머니들을 뵙는 게 의무감처럼 느껴져 나를 쑥 밀어넣는 게 주저되었다. 지금까지 늘 일하면서 에너지를 얻어왔는데 이상하게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게 내 일이 맞나 망설이는 때 시어머니와 이야기하다 일을 말씀드렸더니 내 성향이 노인들을 감당하기 힘들거라고 손사래를 치시며 말리셨다. 나를 잘 아시는 분이 그리 말씀하시니 그동안 제가 어머니께 많이 부족했나봐요, 했더니 네가 노인들 상대 안해봐서 모른다며 다 나같은 줄 아니 하고 웃으셨다. 노인들 비위 맞추려다 기껏 힘들게 다스려놓은 병 도진다고 한걱정하셨다. 아무리 공부시키는 일이어도 그게 애들 가르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며 단호하게 "그건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셔서 내심 망설이던 내게 피해갈 명분을 주시는구나 생각했고 결국 난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어른을 모시고 사는 분들을 존경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어른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들을 존경한다. 요양보호사의 도움도 받고 이런저런 제도적 장치들이 있어도 시설에 입소하지 않고 동거하는 조건이라면 돌봄노동은 대부분 동거하는 젊은(상대적으로) 여성들의 몫이다. 육아야 걷고 뛰고 스스로 할 수 있는 때가 오니 해방의 기대가 있지만 노인돌봄은 기약도 없이 퇴행과 절대적인 의존을 거듭하다 결국 소멸하는 일이다. 노인돌봄은 육아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노인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 그사실 하나만으로도 절로 존경하게 된다.
늙고 병들면 자식도 마다하고 시설로 모시는 세상이다. 그런데 내 부모도 아닌, 게다가 사회적으로 지지받지도 못하던 시절부터 혼자 지내기 힘든 위안부 피해할머니들을 돌보며 살아오신 마포 평화의 우리집 쉼터 손영미 소장님. 올해 육십세라는데 2004년 서대문쉼터 시절부터 무려 16년을 할머니들과 살아왔으니 그 세월이 차마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마포쉼터는 작년 1월 김복동할머니를 보내고 길원옥할머니 한분만 기거하셔서 그분과 동거하며 파주 자택에는 주말에만 잠깐씩 다녀오셨다고 한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는 것 외에 그녀에게 개인의 삶이란 게 있기는 했을까.
마흔 네살 꽃다운 시절부터 16년 세월동안 많은 할머니들을 떠나보내고 언젠가 다 떠나실 그 곳에서 자신을 조용히 불사른 사람. 그녀를 그 자리에서 견디게 한 것은 최저임금도 후원금도 찬사도 아닌, 자신이 만든 삶의 지향과 지도였을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명분과 당위성으로 설명해도 노인들을, 그것도 피해자 할머니들을 보살피며 사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그렇게 뜨거운 사람이었더냐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덩이 연탄재로 쓸쓸히 남는 게 두려워
연탄 한장되지 못하는 우리가 아니더냐"
했던 안도현 시인의 일갈처럼 기꺼이 스스로 연탄재의 길을 걷던 분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한번도 타인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꺼이 자신을 내어줘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함부로 휘두르고 써제끼는 칼과 펜은 이미 사회적 흉기가 된지 오래다. 자신의 신념으로 지탱해온 삶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지옥의 삶. 개인의 행복을 위한 삶을 내려놓고 길원옥 할머니의 아들도 못한 16년을 타인을 위한 삶을 살고도 끝내 부정당한 현실을 못견뎌 극단의 선택을 했을 것이다.
검찰은 고발장 하나로 정의연 사무실 압수수색도 모자라 정의연 회계자료를 은닉했을 거라며 마포 쉼터를 압수수색하고, 안성쉼터와 안성쉼터 시공업체 사무실도 압수수색했다. 사람들에게 겁주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기술자들이 고인을 조사한 일도 출석요구를 한 일도 없다고 뻔뻔하게 시치미를 뗀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 이후 윤미향 의원도 손영미 소장도 어떻게 살아왔을지 짐작이 된다. 시도때도 없이 초인종을 누르고 전화를 걸고 마당에 카메라 렌즈를 고정시키고 사람만 나타나면 낮밤을 가리지 않고 플래시를 터뜨렸을 파파라치들.
데칼코마니다. 전직대통령을 그렇게 보내고 조국과 그의 가족을 모두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그렇게 많은 억울한 피의자들을 보내고도 아직도 그 못된 습을 버리지 못하는 벌레같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한통속이 되어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대며 더러운 웃음을 짓는 똥파리들. 며칠전 국회의 윤미향 의원사무실 문틈에 기자들이 매달려 핸드폰을 들이대고 역시 삼성폰이 더 좋다느니 하는 한장의 사진은 악마의 얼굴이었다. 블라인드의 빈틈으로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그녀가 웃는다고 보도하는 사람들을 누가 기자라고, 언론인이라고 부르는가.
이용수 할머니는 이제 당신이 무슨 일을 하신 건지 생각이라는 걸 하고 계실까 싶다. 시모께 혹독한 시집살이를 받은 트라우마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않은 나의 시어머니는 치매가 아니어도 변덕이 심하고 심술이 많은 게 노인이라고, 시기심과 질투가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며 나에게 노인과 함께 일할 생각을 하지 말라셨는데 그분을 보며 그 말씀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면 너무 무례한가.
92세의 연세답지 않게 세련된 디자인의 멋진 자켓을 입으시고 정대협과 정신대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민모임이 26년간 당신들을 하나도 도와준 게 없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먹었다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왜 난 그분께 감정이입이 안되는 것일까. 당신이 부정하고 있는 것은 윤미향과 정대협, 정의연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 그리고 당신들과 함께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던 시절부터 광야에서 눈비를 맞은 수많은 활동가들과 시민들이 오랜세월 함께 쌓아올린 성과임을 진정 모르시는 것일까. 먼저 가신 당신의 동료들에게 진정 당당한 문제제기인가 묻고 싶어지는 나는, 인류애가 부족하고 패륜적인 사람인가. 노인혐오로 이어질까 두렵다는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가족과 함께 한가하고 평화로운 주말을 즐기다 부고소식을 듣고 내 마음도 함께 무너졌다. 내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같은 개인의 삶을 마다하고 오로지 위안부할머니들에게 당신의 생을 내어주며 헌신해오신 손영미 소장님, 그동안 정말 애쓰셨습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이용수 할매요..
이 분의 보살핌을 받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할매 옆에 있는 이들 보다도
더 정성을 다해 할매들 모셨다는 것은 인정하실거 같네요
여태 할매를 그래도 진심을 다해 모셨던 분들에게 그만 욕을 하길 바랍니다
이제는 최봉태 변호사 욕도 하셨네요
와요..최변호사도 위안부 팔아 돈 벌었다고 할 참이었어요......이제 그만하세요
어짜피 이제 할매 옆에는 곽상도는 있을겁니다...그게 언제까지는 모르겠지만..끝까지라는 단어를 쓴 걸로 알아요...
할매에게 돈 나가는걸 그리 싫어 했던 곽상도가 보살핀다니 보살핌 받으시고 고만 하세요
손영미 소장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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